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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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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역사는 기원전 8000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08년 파리 15구에 있는 앙리파르망 거리 근처에서 중석기 시대에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인간의 뼈와 거주지 유적이 발견되었다.[1] 기원전 250년에서 기원전 225년 사이에 켈트족의 한 갈래인 세노네스족에 속하는 파리시족센강변낭테르에 정착하여 다리와 요새를 건설하고 동전을 주조하며 유럽의 다른 강에 있는 정착지들과 거래를 시작했다.[2] 파리라는 지명은 이 부족명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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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 (1410년) 6월 장에 실린 시테섬. 시테궁생트샤펠 성당이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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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년의 파리, 니콜라 장밥티스트 라귀에네 작품. 퐁뇌프에서 바라본 시내 전경. 게티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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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의 파리. 몽트마르트 대로의 풍경. 카미유 피사로 작품. 예르미타시 미술관 소장.

기원전 52년,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로마 군대가 파리시족을 정복하고 루테티아 요새를 세웠다. 루테티아는 갈로로마인의 거점으로 성장하였다.[3] 서기 3세기에 기독교가 들어왔으며 서로마 제국의 붕괴 후인 508년 프랑크인의 왕 클로도베쿠스 1세가 자신의 수도로 삼았다.

중세 시대에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이었고 종교와 상업의 중심지이자 고딕 건축의 발상지였다. 13세기 중반 설립된 파리 대학교는 유럽의 초창기 대학교 가운데 하나이다. 중세의 파리는 14세기 흑사병과 15세기 백년 전쟁을 겪으며 쇠락하였다. 1418년에서 1436년 사이 파리는 잉글랜드부르고뉴 공국에 의해 점령당하였다. 백년 전쟁이 끝난 뒤 발루아 왕조가 파리를 수도로 프랑스 왕국을 통치하였다. 16 세기 파리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위그노 전쟁으로 흔들렸지만 한편으로는 유럽의 서적 출판 중심지로서 문화 수도의 면모를 갖추었다. 1589년 앙리 4세가 개신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두 집단 사이의 화해를 도모하면서 부르봉 왕가를 열었다. 부르봉 왕가는 절대주의를 내세우며 중앙집권적인 국가 운영을 하였다. 18세기 파리는 계몽주의의 발상지였고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1806년 나폴레옹은 자신의 전승을 축하하기 위해 에투알 개선문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9세기 동안 파리는 유럽 패션의 중심지이면서 두 번의 혁명이 일어난 정치의 중심지였다. 나폴레옹 3세조르주외젠 오스만에게 파리의 재개발을 맡겼다. 1852년에서 1870년 사이 파리는 새로운 도로, 광장, 공원을 갖추었고 1860년 오늘날의 경계와 행정구역으로 확장되었다.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기념하여 새워진 에펠탑은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20세기 파리는 현대 미술의 중심지였다. 인상파, 입체파, 야수파와 같은 미술 사조가 파리에서 시작되었고 많은 예술인들이 자석에 이끌리듯 파리로 모여들었다. 20세기는 전쟁의 시기이기도 했는데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파리는 포격을 당했다. 파리의 인구는 1921년 210만 명을 정점으로 그 이후 감소하였다. 조르주 퐁피두 센터, 오르세 미술관과 같은 새로운 박물관들이 세워졌고, 루브르 박물관에는 유리 피라미드가 만들어졌다.

21세기 파리는 중산층이 교외로 이주하면서 꾸준한 인구 감소를 보였다. 도심 공동화가 일어나는 사이 옛 프랑스 식민지에서 이주해 온 가난한 사람들이 파리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 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겪은 차별과 빈곤에 의한 사회적 불안은 2005년 소요를 비롯한 2015년 테러의 배경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슬람 급진주의를 내세운 테러는 파리의 불안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2020년 코로나19 범유행으로 많은 사망자가 나오고 있다.